제 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 났을까?

2024. 2. 11. 21:12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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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차 세계 대전은 1914~18년까지 제국주의 국가가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 전쟁을 벌인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라 할 수 있었으며 비행기, 잠수함, 독가스 등의 새로운 무기들이 쓰여지면서 전쟁의 양상은 처참하게 흘러갔다.

1914728일부터 19181111일까지, 43개월간 전쟁은 지속되었다. 발칸반도에서의 독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대립으로, 군사 비밀동맹을 맺은 각각의 진영이 동조하며 세계전쟁이 발발한 것인데, 집단적 자위권을 근거로한 군사동맹이 전쟁을 억제할 것이라는 전()세기의 비스마르크 외교 동안의 국제이념이 사라예보에서의 한 발의 총탄으로 박살났다고 할 수 있겠다. 전투는 거의가 독일의 동부전선, 서부전선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밖에도 터키 주변의 서아시아, 독일 세력권에 들던 아프리카, 중국에서 독일에 맞서던 일본의 공격 등으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또한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전쟁은 장기화 되었고, 이로서 각 나라마다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내의 경제와 산업, 동원태세의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일부의 전문적인 직업 군인들 만이 전투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걸고 벌이는 총력전이 될 수 밖에 없어지고 말았다. 전쟁은 고도의 기술이 쓰이기에 이르러 비행기, 잠수함, 독가스 등의 무기가 등장하며 군인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을 포함해 광범위한 인적, 물적 희생을 낳는 전쟁이 되고 만다. 전쟁의 장기화, 전선의 확대, 국민생활의 희생확대로 차례로 각국에서 전쟁 반대의 기운이 감돌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19175월 미국의 참전과 11월의 러시아 제 2차 혁명이었다. 미국의 참전은 서부전선에서의 독일의 전진을 막았고, 러시아 혁명으로 동부전선에서는 단독 평화조약의 가능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독일 국내에서도 병사와 노동자 사이에서 독일 혁명이 일어나며 191811월에 전쟁은 종결된다. 다음해에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시작되어 1919년에 베르사이유 조약으로서 강화조약이 체결된다. 이로서 새로운 국제적 평화 유지기구로서 국제연맹을 발족시키고, 집단안전보장을 새로운 국제 이념으로 하는 세계로 전환된다. 하지만 베르사이유 체제라 불리는 전후의 체제는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 대전 이후 파시즘의 대두, 아시아 민족주의의 대두라는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되면서, 20년 후인 1939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근본적인 원인은 열강의 영토, 식민지, 세력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이다. 열강은 19세기 말부터 각지에서 충돌이 끊이지 않았지만, 특히나 발칸문제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에서 각각의 배후에 있던 독일과 러시아가 응원을 하는 형태가 되어간다. 그리고 빌헬름 2세가 세계정책으로 전개한 3B정책 등이 서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있어서는 영국의 3C정책, 프랑스 식민정책과 충돌하는 등의 문제로 2대 진영이 형성되게 된다.

그리고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시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를 둘러싼 정세가 복잡하게 관계하였다. 독일 쪽에 붙었던 오스만 제국에서 영토내의 아랍인 세력을 영국이 지배함으로서 서아시아에도 전쟁이 불붙기 시작하게 되고, 동아시아에서는 영일동맹을 구실로 일본이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령을 공격했다. 이렇게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인류적인 전쟁으로 퍼졌다.

본질은 제국주의 열강이 추진한 비밀군사 동맹의 세력 균형에 따른 국제정치라는 것이 파탄을 맞으며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미합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제정치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선전되기에 이른다. 연합제국은 이 전쟁을 ‘카이저 제국정치’에 대한 데모크라시이며,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독일 군국주의를 타도하고 국제정의를 유지함으로써 소국의 권익을 보호하는 전쟁이라 밝혔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이란 표어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쟁이 민족적 대립을 방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했지만, 차츰 반동적인 러시아와 퇴폐한 프랑스, 위선적인 영국을 타도하기 위한 전쟁이란 목적으로 변질되어 간다.

제국주의 열강이 동맹국 측과 연합국 측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거기에 주변국들이 이해관계로 대립하게 되고, 영토문제를 둘러싼 욕심으로 서로 진영에 합류하면서 세계는 크게 이분된다.

동맹국은 삼국동맹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를 축으로 터키, 불가리아가 합류한다. 연합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축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그리스가 합류하고 나중에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에서 이탈해 들어온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중국 등 32개국이 연합군 측에 붙게된다. 또한, 영국의 해외자치령이던 케나다,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도 협력을 하게 되고, 식민지인 인도에서도 징병을 하게 된다. 전쟁의 후반인 19174월에는 미국이 참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세계대전의 발자취

19146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된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유럽이 주된 전쟁터가 된다. 그 후 동, 서의 전선에서 장기화되고 총력전이 계속된다.

-선전포고.

19146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 정부는 세르비아인 암살범의 배후에 세르비아주의 민족단체와 그들을 지원하는 세르비아 정부가 있다고 결론짓고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와 정부로부터 백지위임장을 받아내 최후통첩을 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가 이에 거부하자 7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고, 이것을 알게된 독일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하자 러시아도 참지 못하고 81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꼴이 되었고, 독일은 프랑스 측에 중립에 설 것을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거절하고 3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발칸의 지역분쟁은 유럽열도의 연쇄적 전쟁으로 이끌어 세계전쟁으로 발전한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략

독일은 82, 벨기에에 독일군의 통과를 요구한다. 이것이 거부당하자 4일에 침략을 개시해 중립국 벨기에가 침범당하자 이것을 이유로 영국이 참전하게 된다. 벨기에는 뜻밖에도 격렬히 항거했지만 독일군은 6일에 리에주를 포위하고 열차로 대포를 실어날라 포격을 가한다. 또한 비행선 제플린호로 공중폭격을 가했다. 대량 포격과 공중폭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리에주는 항거를 끈질기게 계속해 816일까지 버텨낸다.

 

19149,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에 기반해 대군을 벨기에에서 침입시켜 파리 서쪽으로 진출시켰다. 파리의 서쪽을 우회하려던 계획이었지만 현지 지휘관이 도중에 방향을 바꿔 파리의 동쪽을 향했다. 그리고 이동중인 독일군을 영국의 정찰기가 발견하고 프랑스군이 급습을 하며 호기를 맞게된다. 파리 동쪽의 마른강 부근의 전투는 독일군 몰트 케가 안전을 위해 전선에서 물러서면서 독일군의 진격은 일단 멈추게 된다. 이렇게 6주안에 파리를 함락시키려던 독일군의 전략은 무너지게되고 장기전의 양상을 띠면서 서부전선에서의 교착 참호전이 계속된다.

 

95, 프랑스 제 6군은 마른에서 독일군을 향해 포격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열세에 있었고 이 전선에 신예부대를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당시 파리의 거리를 달리던 택시들은 거의가 르노제 였는데, 프랑스군은 급히 이 택시들을 끌어모아 전선으로 병력을 실어나르게 한다. 그 댓수가 600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작전이 적중하여 마른 전투는 승리하게 되고 이후 참호전, 진지전의 양상을 띠게되어 독일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서 파리는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르노제 자동차는 나중에 ‘마른의 택시’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현재도 그 중 한대는 파리의 르노 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에 무임으로 이용했던 것은 아니었고 통상적인 택시 요금이 모두 지급되었다.

 

독일군은 벨기에령을 파죽지세로 뚫고 들어가 마침내 프랑스의 국경을 침입했다. 슐리펜계획에서는 크게 우회하여 서측으로 돌아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작전을 지휘하던 몰트 케 장군이 진로를 바꾸게된다. 그것을 영국군이 발견하고 육상에 있는 프랑스군에 연락해 조프르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치며 95일 마른전에서 독일군의 진군을 막게 된 것이다.

독일의 총사령관 몰트 케는 당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이 예상이상으로 신속하게 국경으로 진군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을 일부 이동시켰기 때문에 독일군을 전선에서 후퇴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독일의 단기 결전책은 실패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서부전선이 형성된다. 양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며 장기전으로 돌입한다. 독일군은 참호전에서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는데 바로 독가스의 개발이었다. 19154월 이프르전에서 처음으로 독가스를 사용하며 전쟁은 더욱 암담한 양상을 띠게된다.

 

서부전선에 실재로 참전했던 독일군 에리히 레마르크는 1927년 그 당시의 전쟁체험을 바탕으로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발표했다. 이것은 잔혹한 전장의 현실을 고발하며 반전(反戰)문학으로서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부에 형성된 전선을 동부전선이라 부른다. 19148, 러시아군이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대패하여 전선은 뒤로 밀려났다.

독일의 동측인 동부전선에서 1914817, 독일령의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한 러시아군이 탄넨베르크에서 독일군에 패한다. 러시아군은 당초, 독일의 예상을 상회하는 속도로 진격해 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보급과 통신에 어려움이 생겨 진격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다. 독일의 무너진 전선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파견된 새로운 사령관 힌덴부르크 대장과 힌덴부르크 참모장은 러시아군의 무선을 도청해 진로를 알아내고 열차로 대군을 이동시켜 탄넨베르크의 러시아군을 급습해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에서 25만명의 러시아 군사중 125천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지만 독일군의 피해는 1만에 불과했다. 탄넨베르크에서의 러시아군의 처참한 패배는 차르정부의 위신을 현저하게 하락시키며 러시아 혁명 발발의 신호탄이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러시아에 대승을 거둔 탄넨베르크는 현재의 폴란드 왈샤와 북방 약150키로 정도에 위치하며, 그룬발드라 불린다. 이 땅은 1410년 독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폴란드 왕국)군과 싸워 격파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독일 기사단이 대패를 한 이 전투는 독일인에게 있어서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요번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그 이름을 탄넨베르크전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발칸반도에서의 양()진영의 대립도 계속되어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동맹국 측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영국의 연합국 측이 곳곳에서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민족 국가의 약점이 들어나며 패전하는 일이 늘고 있었다. 또한 동부전선에 속하지는 않지만 터키령에서도 갈리폴리전이 일어, 중동에서도 독일, 터키군과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각축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터키)191410월에 참전했기 때문에, 다르다넬스 해협이 독일 해군에게 정령된다.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위기였고 영국에게도 스웨즈 운하의 방위에 커다란 장해가 되었다. 때문에 영국의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은 영불(英佛)군과 러시아군이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터키 갈리폴리 요새를 공격, 점령하는 작전을 세운다. 이 작전을 기반으로 1915425,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연합군(ANZAC)이 합세해 공격을 가했지만, 터키군 수비대장 무스타파 케말의 뛰어난 지휘로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공방이 계속되는 사이 19151014일에 불가리아가 동맹측에 참전을 하고, 12월에는 세르비아군이 오스트렐리아군에 패배하면서 독일, 오스트리아군과 터키군이 직접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어 연합국군의 갈리폴리 함락작전은 실패로 끝이난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다음해 161월에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기가 싫었던지라 1510월에 그리스령인 살로니카에 상륙해 교두보(橋頭堡)를 구축하고, 그리스를 설득해 연합국 쪽으로 끌어들인다.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불군을 격퇴한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은 이때에 약관 34세였다. 그는 갈리폴리의 영웅으로서 전후에도 이름을 드높혔으며, 후일 터키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다. 한편 작전에 실패한 처칠은 그 책임을 물어 일시 한직으로 물러난다. 오스트렐리아에서는 425일을 ‘안작데이(ANZAC)’라 해서 전사자를 추도하는 날로 정하고 있다.

(A=Australia, NZ=New Zealand, A=Army, C=corps)

 

베르됭은 현재 프랑스의 로렌느현 북부이고 벨기에 국경 근처이다. 바로 오래전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던 곳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19162~6, 프랑스군의 베르됭 요새를 향해서 독일군이 총공격을 하여 최대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베르됭 전투에서는 막대한 양의 포탄이 사용되어 프랑스는 315, 독일군이 28만 천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이 방어에 성공한다.

 

19166~11, 북프랑스의 솜 주에서 독일군과 대치하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총공격이 전개된다. 영국군의 헤이그 장군은 아직 실험단계에 있던 전차를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다. 전투는 소모전의 양상을 띠며 영국군에서 42, 프랑스군 20, 러시아군 45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승패도 없이 끝나고 만다. 열광도 없었고 대의 명분과도 거리가 있는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영국과 독일은 함대구축에 경쟁적으로 힘을 쏟아 이미 거대한 해양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전 당초에는 영국이 해권을 장악해, 독일 해군은 발트해에 묶여있어 그 막대한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독일 동양함대는 태평양을 종횡무진 활동하며 영국, 프랑스군과 싸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칠레의 혼 곶을 돌아 대서양을 북상하던 중 191412월에 영국 해군에 패해 격침된다.

그 후, 육상군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독일군은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영국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전략적인 해상결전을 시행한다. 그것이 19155월의 유틀란트 해전이었다. 독일함대는 선전해 영국함대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지만 해상봉쇄망을 뚫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독일이 고안해 낸 것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었다. 이것은 U보트라 불리는 잠수함이 경고도 없이 상선을 어뢰로 공격하는 작전으로 19172월에 착수했다. 이것은 예상 이상으로 영국에 큰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무방비의 상선을 공격한 RMS루시타니아 처럼 제 3국을 피해를 입혔고, 특히 미국인 피해가 속출하자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는 꼴이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여기서 또 한번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영국은 잠수함 공격으로부터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로이드 조지가 콘보이 시스템(호위선단 방식)을 고안하고 실행하여 피해를 격감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지중해에서도 독일군과 프랑스, 영국 해군이 교전을 벌였고, 흑해에서는 러시아 해군과 오스만 해군이 싸우고 있었다. 19172월 영국은 일본 해군에 지중해로의 파견을 요청하고, 일본 해군은 순양함 3, 구축함 12척을 파견한다. 그 결과 구축함 1척과 그 외 수 척이 침몰되고 78명이 전사하긴 했지만, 독일 U보트 4척을 격침시키는데 성공한다.

1차 세계대전은 거의 대부분이 유럽 독일,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 국경, 발칸반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 부근이 전쟁터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 일본이 참전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전쟁터가 생기곤 했다.

 

-중동의 정세: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에 붙어 참전했기 때문에 영국은 발빠르게 1914년에 이집트의 보호국화를 오스만 제국에 통보하고 스웨즈 운하를 확보했으며, 카이로를 거점으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19166, 아라비아 홍해 연안의 헤자즈 지방에서 아랍의 족장인 후세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영국해군 정보장교이던 토마스 로렌스가 파견된다. 로렌스는 아랍군의 고문격으로 게릴라전을 지휘했다. 로렌스는 아랍의 게릴라를 이끌고 오스만군의 철도를 파괴하는 등 후방교란책을 펼치며 19189월까지 활약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라비안 로렌스’이다.

 

-일본의 참전: 개전 직후인 19148. 영국은 일본에게 동중국해의 독일함대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출병을 결정하지만, 일본의 중국,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을 경계한 미국이 영국 측에 요청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영국은 할 수 없이 일본에 요청을 철회한다는 입장을 밝히지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뜻을 굳힌다. 그리고 815,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을 하고 92일 산동반도에 상륙한다. 그리고 11월에는 자오저우만 초입의 독일 청도요세를 함락시킨다. 이때에 일본의 비행기가 처음으로 참전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독일령이던 태평양제도 마샬, 마리아나, 파라오, 카로린제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중국, 태평양의 권리를 손아귀에 넣은 일본은 19151월 중화민국 위안스 카이 정부에 대해서 중화21조요구를 제시한다. 구미제국이 세계대전으로 발목이 묶인 사이 중국 본토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한 것이다. 일본의 이런 노골적인 대륙으로의 권리확장에 대해서 영국, 미국이 경고를 했지만, 일본을 독일쪽과 대치시킬 필요가 있었으므로 중국에 대한 요구는 암묵적으로 묵인하고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의 결말

전쟁을 일으킬 당시, 열강의 수뇌들은 단기간에 결전을 치루고 적당한 시기에 수습할 작정이었지만, 19149월 마른강 전투 이후 사태가 심각하게 빗나가 발을 뺄래야 뺄 수 없는 협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대로 일보 전진 후퇴를 반복하던 정세는 1917년에 들어서 갑자기 급변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 그 중 한가지가 제 2차 러시아 혁명이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무너지고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2중통치 태세가 되자, 임시정부는 연합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전쟁 계속을 표명하지만 소비에트는 이에 반대한다. 독일은 비밀리에 스위스로 망명중인 소비에트의 지도자 레닌이 독일령을 통과할 수 있도록 봉인열차로 러시아로 가게 해 주었고, 4월에 귀국한 레닌은 4월강령을 제시하며 10월 혁명을 지도한다.

레닌이 나서며 시작된 반전, 반임시정부의 무장봉기에 대해서 임시정부는 전선에서 군대를 되돌려 탄압하기에 이른다. 7월에 권력을 장악한 케렌스키도 전쟁 속행을 표명했었지만 정작 전선에 나서는 병사들 사이에서 전쟁기피 심리가 퍼지며 전선에서 이탈하는 병사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볼셰비키가 무장봉기해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케렌스키 내각은 붕괴된다. 118, 레닌은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고 모든 교전국에 대해서 무병합, 무보상을 조건으로 한 즉시 평화를 제창한다. 이를 연합국은 모두 무시했지만 독일만은 좋은 기회로 여겨 19183, 양자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단독 강화(講和)를 성립시킨다. 이로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의 독립과 그 밖의 대폭적인 영토축소를 인정하게 된다.

 

-미국의 참전: 미국은 독립주의 외교원칙을 고수하며 대전 발발당시와 같은 중립을 표명했다. 한편,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는 무기와 물자를 원조하며 실질적으로는 연합국에 크게 기울어 있던 상황이었다. 단지 미국 내에서 남의 나라 유럽에서 미국청년들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 윌슨 대통령도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55월 루시타니아호 침몰사건을 기점으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한 비난이 일며 윌슨 대통령이 참전을 결의하고 19174월에 의회 동의를 얻어 미합중국의 참전을 결행한다.

미군이 유럽전선에 파견되면서 전국은 결정적으로 연합국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된다. 또한 윌슨 대통령은 191711, 레닌이 ‘평화에 대한 포고’를 발표하자 그것에 대항해서 전쟁목적의 명확화와 전후 처리의 원칙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 다음해 118일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평화 원칙’을 선언한다.

 

-시베리아 출병: 1차 세계 대전 말기 새로 집권한 러시아의 공산정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 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로 파병했고, 영일 동맹에 의거하여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지리적 이유로 자국에 가까웠던 시베리아에 파병하여 붉은 군대와 싸웠다. 서부 전선에서 병력에 묶여 있던 다른 연합국에 비해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다.

 

다른 연합국의 시베리아 파병요구에 대해 적극적 수용론과 소극적 참여론이 있었으나, 일본 정계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파병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레오나드 험프리즈에 의하면 당시 일본의 참여에 대해 "당시의 일본은 영토획득의 야심, 러일전쟁 후에 획득하지 못했던 이권의 탈취, 지정학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유도 있었다. 즉 천황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공산주의가 일본에 파급되는 것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을 침공했다.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 호 동부까지 점령했고,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다른 연합국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연합국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주둔을 계속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와 같은 연합국들도 일본의 영토욕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공간에는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군이 당한데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더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쪽으로 향했고, 1922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파병은 백군(반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 러시아인들이 외세와 외세를 등에 업은 백군에 등을 돌리고 공산정부와 붉은 군대를 지지하여 최종적으로 공산 정부가 승리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독일군은 러시아와의 단독강화로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렸지만, 191888, 북프랑스의 아미앵 부근에서 미군이 참가한 연합군에 의해 격파되고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발칸 방면에서도 불가리아가 9월말에 정전에 응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살로니카로에서 짖쳐오는 연합군 북상과 이탈리아군의 공세에 전의를 상실했다. 오스만제국군도 영국의 팔레스타인 진출과 아랍의 반란으로 숨통이 죄여오자 정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독일혁명의 발발: 1918113, 독일에서 무모한 출격명령을 거부한 해군병사가 ‘킬 군항의 반란’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병사, 근로자가 봉기하는 독일혁명이 발발한다. 이로서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며 황제정치는 무너진다. 독일 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장악한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111, 프랑스의 콩피에뉴 숲에서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독일에서는 구사회민주당 좌파들이 결성한 ‘독일 공산당’이 19191월에 봉기해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환을 노렸지만, 임시정부가 진압에 성공하며 2월에 자본주의, 의회주의로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다.

이때에 독일 육군은 아직 프랑스의 서부전선에 남아있었는데, 사실 연합국군이 독일로 밀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독일의 참모총장이던 루덴도르프는 미군의 병력을 계산한 결과 독일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정전(停戰) 판단을 내리지만, 다른 장교들은 아직 패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에 승복을 하게 된 것은 국내에서의 혁명 탓이었다는 의식이 그들에게는 강하게 남게된다. 이 의식은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요구에 반발함과 동시에 훗날 다시 독일 군국주의가 꿈틀거리게 하는 불씨가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사자는 약 802만명, 부상자 2122만명, 민간인 사상자 664만명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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