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 죽어서 가게 되는 6가지 혼란한 세계, 우리는 죽어도 현세의 응어리를 지고 간다, 깨달음의 장

2024. 2. 5. 00:26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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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도윤회란 어떤 것일까?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육도를 사후의 세계가 아닌 정신적인 가르침이라고 평가한다. 마음을 다스리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해석으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너무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육도가 진짜 사후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떨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 육도가 사후가 아닌 살아있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고방식이 이해하기에 더 혼란함이 적을 것이다. 지옥도 없고 다른 더 심한 고통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사후의 세계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데에 매달린다. 하지만 과연 진짜로 그럴까. 불경에서 사후의 예를 다루는 곳은 수 없이 많다. 이것이 모두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일까? 만약 지옥과 극락이 우리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화가 나는 마음은 지옥이고 용서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는 상태는 극락이 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그렇게 안일한 것이 아니다.

지옥에서의 수명은 가장 고통이 적다고 하는 등활지옥 조차도 인간계의 50년을 하루로 해서 그것이 500년간 이어진다고 한다.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시간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900만년에 해당한다. 한번 지옥으로 떨어지면 쉽게 몇 년의 옥살이를 하고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인과의 도리를 통해서 풀이되고 있다. 현재의 심중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후에도 결과적으로 남아있게 된다. 우리의 미래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어떤 인간이건 평등하게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 죽은 후에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육도의 사상이 나오게 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물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상을 지니고, 그 세상의 수는 생명의 수만큼 정확히 존재한다고 한다. 같은 세상에서 같은 시간대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들 눈에 보여지는 풍경은 사뭇 다를 수 있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상이 호랑이 상이거나, 쥐 상이거나, 토끼 상이거나, 물고기 상이거나 하는 성격을 띄는 경우도 세상을 구성하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무한히 많으면 설법을 할 수 없기에 불교에서는 간단한 6가지의 분류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인 것이다. 이것을 육도라고 한다. 때로는 이 분류가 오취라고 해서 약간 변형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죽어야 갈 수 있는 세계의 분류이다. 이 여섯 개의 세계는 천상계를 포함해 모두 혼란함의 세계이다.

 

*지옥계

지옥계는 고통이 매우 심한 세계이다. 지옥에서 내리는 눈의 온도는 현세의 용암의 온도라는 말도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한 방울의 물방울이라고 한다면, 지옥에서 느끼는 고통은 바다와 같다고 전하고 있다. 이 세계는 무기한의 영속적인 세계이며 현세에서 살인을 한 사람은 어김없이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아귀계

아귀계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 받으며 메말라 피골이 드러나는 세계이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욕심이 극심하고, 남에게 인색하게 살면 떨어진다고 한다.

 

*축생계

축생계는 동물이나 조류, 곤충, 물고기의 세계이다. 약육강식의 세계로 강한 개체에게 잡아먹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항시 생명을 위협받으며 불안에 떨게 된다. 이곳은 인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행복을 시기하고, 타인의 불행에서 즐거움을 얻는 어리석은 인간이 윤회하게 된다. 이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는 삼악도(三惡道)라고 해서 특히 고통이 심한 세계라고 알려져 있다.

 

*수라계

수라계는 투쟁이 격한 세계이다. 싸움과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말이 있듯이 매우 격하고 난폭한 세상이며, 몸에 상처가 끊임없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계

인간계는 고통도 있으며 즐거움도 있는 우리들의 세상이다. 이 세계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세상으로 육도 중에서 유일하게 불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통과 공포, 괴로움만이 전부였던 세상과 비교하면, 또 다른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샘이다. 이 세계를 교육의 장이라 일컫는 것은 스스로가 가르침을 배우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유일 한 점 때문이다.

 

*천상계

천상계는 고통이 적은 즐거움이 충만한 세계이다. 하지만 즐거움, 쾌락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며 혼란스러움이나 슬픔도 존재한다. 천상계에서는 나이를 먹으며 젊어서 즐거웠던 만큼, 늙어서 고통을 받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육도의 세계는 모두 일관되게 혼돈을 지니고 있다. 고통을 수반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고통을 느끼고 수레바퀴 돌듯이 육도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의 반복의 끝은 석가가 되었을 때 끝이 나게 된다고 한다.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면 죽음과 동시에 정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정토왕생이라고 하며 정토는 즉, 극락이다. 그래서 극락왕생이라고도 한다. 이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것을 ‘해탈’했다고 하며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그 표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살아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극락정토에 들게 되면 항시 변함없는 행복을 손에 넣게 된다. 바로 절대적인 행복함의 세상이다. 우리가 정말로 행운아인 것은 그 표를 구할 수 있는 인간계에서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진정한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실인지 추상적인 것인지는 누구도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개념에 의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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