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수명에 관한 쓸데없는 생각

2023. 12. 31. 00:0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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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 살기도 하고 얼마 살지 못하기도 합니다. 최장수 기네스 기록자는 122세였습니다. 과연 인간의 수명은 무엇으로 정해지는 것일까요? 요번에는 그런 인간의 수명의 차이에 대해서 비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근거는 단 1도 없으며 요번 글은 단지 머릿속에서 떠도는 잡다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어두는 형식이 될 것입니다. 조리있고 과학적인 생명에 대한 고찰을 원하신다면 요번 보스트는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연계를 둘러보면 수명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프로그래밍 되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 산란을 마치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거미는 산란을 하고 부화된 자식들에게 잡아 먹힙니다. 매미는 성충이 되어 땅 밖으로 나와 아주 짧은 시간을 울다 모두 죽습니다. 이와 같은 예는 자연계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사입니다. 자연계에서 많은 종들이 태어나 먹이사슬에 의해 잡아 먹히거나 사고로 인해 죽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천수를 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천수라는 것이 어느 정도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간도 이랬습니다. 먹이 사슬에 의해 잡아 먹히거나 부상당해서 또는 병으로 죽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천수를 누리는 경우가 더 적었을 것입니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수명은 60세는커녕 40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천수를 누리고 죽은 사람들, 즉 자연사로 인정되는 경우도 일정 퍼센테이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프로그래밍된 천수에 해당하는 수명은 과연 몇 살인 것일까요? 여기서 운명이라는 것을 포함한다면 천수의 폭은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병사도 인간의 천수에 해당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유전자가 조합이 되는 타이밍에 이미 어떤 병이 어느 시점에 걸릴 것인지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 중 암이라는 것이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무시 못할 정도가 되었지만, 몰라서 그렇지 옛날에도 암으로 죽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미친듯이 열심히 살다 인생의 목적이 사라져버린 타이밍에서 덜컥 암이 걸리는 사람도 이상하게 많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스스로가 요번 생에서 슬슬 끝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암으로 인해 세상을 끝내게 되는 것이 억울하고 슬픈 생각이 들 수 있어도 어쩌면 이것도 이미 정해진 ‘천수’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건강하다가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스스로가 안도하고 있었더니 덜컥 암이 발견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혹시 암이 스스로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암에 걸려서도 필사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다시 건강을 되찾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정한 인생의 목표를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생환하게 되는 것일까요?

암은 육체를 죽이는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죽음으로 이끄는 카운트다운은 아닙니다. 암은 젊은 사람도 걸리고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낫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또한 항암치료를 하고 성공하는 많은 사람들도 있으며 새로운 치료법도 계속해서 개발되고 있습니다.

 

어떤 병이 걸리는 것도 인생에서 이미 정해진 어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DNA의 영향이건 항상 건강하건 병이 들건, 사람의 수명과의 인과관계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과 장수는 세트로 묶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건강해도 빨리 죽는 사람과 병이 들어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병에 걸려도 죽음에 달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인간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기 위해 건강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수를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곤충의 수명은 몇 개월에서 몇 년, 개나 고양이는 길어야 20, 다른 많은 동물들도 50년을 넘기는 동물은 몇 안 됩니다. 사람은 평균 80세에 달했지만 과연 장수란 것이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요? 동물의 수명을 생각했을 때 개보다 사람이 오래 살고, 사람보다 코끼리, 코끼리보다 고래가 오래 산다는 것을 봤을 때 어쩌면 몸이 커질수록 수명도 늘어 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동물들이 느끼는 시간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 생명에 대한 관점에 차이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 수명이 더 짧고 느리게 움직일수록 수명이 길어지는 듯 하기도 합니다. 또한 빠르게 움직이는 주체에게는 시간은 더 길게, 느리게 움직이는 주체에게는 시간이 더 짧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즉 같은 하루라고 하더라도 체감하는 길이는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수명이 짧다고 우리는 가여워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들의 입장에서 시간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짧았던 것일까요? 그들이 만약 인간보다 시간을 느끼는 감각이 더 길다고 치면 어떨까요? 동물들은 동물들 나름대로 삶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대부분 경험하고 체감상 거의 인간과 비슷한 정도를 살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약하자면 수명이란 ‘경험의 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란 것입니다.

 

억측이라고 할 수 있지만 천재들이 빨리 죽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경험을 하면 할수록 어쩌면 그 생명 게이지는 빨리 소비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비슷한 정도의 생명 게이지를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그것을 소비하는 능력이 모두 다르고 많은 도전과 경험을 쌓을수록 그 양은 빨리 줄어드는 시스템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몸집이 크면 클수록 생명력이 플러스 된다는 것과 위험에 대한 분석력이 탁월하면 할수록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클수록 천적이 적어질 수도 있고)인간은 코끼리보다 몸집이 작지만 코끼리 이상을 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위험에 대한 대처능력 때문입니다.

 

원시시대에는 평균수명이 20이 안되었고 조선시대에는 40살 정도였습니다. 1800년대에도 60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도 동물처럼 모두 독립되어 한 개체로 살아간다면 아직도 수명이 20이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등한 몇 몇의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전파하고 공유함으로써 인간은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사회라는 울타리로 스스로를 보호해 나갔습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결코 인간의 천수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80세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수명이 늘어나는 이유는 이러한 공동운명체의 성격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수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처음에도 말 했듯이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상실했을 때 죽음이 다가오기도 하는데, 사회와 가족과 같은 서로 의식하고 통할 수 있는 사명감이나 목표를 제공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 힘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프레셔들로 인해 오히려 수명은 늘어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돌볼 확실한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병이 들어도 잘 죽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건강만을 챙기려 노력하는 사람보다 가족, 자식의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히려 오래 삽니다. 인간의 수명은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를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천수란 병들어 죽지 않고 자연사 한다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은 앞으로도 의료의 발전으로 더 수명이 늘 것입니다. 현대가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보너스 수명이 늘어나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천수니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를 위해 살고, 어떤 것을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많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개개인이 잘나서 장수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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